2012, 경험의 충돌 : 유권자는 계급투표를 하지 않는다

2012-12-23 11:47 오전
손재권
@guardian

경험의 충돌(The Collision of Experience) 

유권자는 계급투표를 하지 않는다


선거 결과에 대한 분석이 한창이다. 승자는 말이 없고 패자는 울분을 토해낸다. 이 에네르기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겠다. 더 좋은 나라를 만들자는,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는 이상은 같지만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한국은 정말 연구대상인 국가다. 이렇게 풍부한 스토리를 가진 나라도 흔치 않다. 더구나 그 기가막힌 스토리는 아직도 세계인들에게 제대로 발견되지 않았다. 전 세계인이 ‘올해의 발견’으로 꼽고 있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예전엔 우리가 알리려고 노력했지만, 알아주지 않는다고 자조했지만, 이제는 글로벌 플랫폼의 위력으로 그들이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스토리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가운데 한국만큼 빠르게 산업화되고 민주화가 정착됐으며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나라를 찾기 힘들다. 지금 한국과 산업 현장에서, 외교 현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국가들은 모두 세계 규모의 전쟁을 일으켜본 경험이 있는 제국주의 국가들이다. 실제로 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들은 한때 세계 정복을 꿈꾼적이 있거나 여전히 자국이 곧 세계라고 외치고 있는 ‘강대국’ 수준을 넘어선 ‘제국’들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 대부분이 90년대 냉전 해체 이후 경쟁력을 상당수 잃었고 2000년대 정보화 혁명이후 한 무더기가 탈락했으며 2010년대 들어오면서 미끄러지는 국가나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과 한국인은 잘 버티고 있다. 그만큼 우리의 잠재력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전후(2차 세계대전) 세대, 전쟁(한국전쟁) 세대, 산업화 세대, 완전 민주화(Full Democratization) 세대, 정보화 세대, 모바일(탈산업화) 세대가 공존하는 국가는 드물다. 잊지말길. 한국은 여전히 기술적으로는 전쟁중인 국가(Technically at War)다. 
2012년말에 느끼고 있는 진통은 이처럼 세대간 뜨겁게 느꼈던  ‘경험의 충돌(The collision of experience)’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풀이해본다. 
이렇게 사분오열될 것 같다가도 일본이 독도 문제로 도발하면, 중국이 위협하면, 싸이나 김연아, 박태환처럼 한국인이 세계 무대에 정상에 오르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뜨겁게 온 세대가 모여 오손도손 태극기를 흔들며 ‘코리아’를 외치는 어쩔 수 없는 민족주의 국가이기도 하다. 

지난 가을학기(Fall Quarter, 2012~13)에 스탠포드에서 ‘캠페인, 투표, 미디어 그리고 선거(Campaigns, Voting, Media and Elections : Political Science 120B, Communication 162/262)’란 수업을 들었다. 
한 학기동안 배운 것을 토대로 이번 선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봤다. 나는 정치학자나 언론학자가 아닌 ‘기자’이기 때문에 기자적(저널) 관점에서 보는 것인 특징이 있을 것이다.
미국 대선과 한국 대선 결과를 놓고 봤을때 공통점도 발견할 수 있었고 민주주의의 차이와 문화, 규모 등 ‘딥펙터(Deep Factor)’로 인한 다른 점도 당연히 있다. 
세계는 변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변한 ‘뉴노멀(New Normal)’의 시대다. 요새같이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는 더욱 변화된 세계에 대한 인식이 중요할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대선 결과는 변한 세계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문재인 후보 지지자들의 상실감이 이만저만한게 아니다. 투표율이 올라갈때만 해도 당선이 유력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75.8%의 기록적인 투표율과 1500만표 가까운 득표에도 선거에 패배한 것으로 인한 충격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세대 갈등이 심각한 상황인데 투표 결과를 ‘세대 갈등이 표출’로만 몰아가다 보면 진짜로 세대 갈등이 깊어지기 때문에 좀 더 정교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미국 대선 직후 수업시간에 강연을 온 댄 발즈(Dan Balz) 워싱턴포스트 정치전문 기자와 얘기를 나울 시간이 있었다. 그는 수십년간 백악관 출입기자로써 선거를 지켜보고 취재한 배테랑 기자다. 그는 올 미국 대선이 “미국 역사상 손에 꼽히는 중요한 선거였다”라고 분석했다. 그는 “기존 상식이 무너지고 새로운 선거 방식이 부각됐으며 미국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선거였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그 수업시간 이후 한국 대선을 지켜봤다. 한국에서도 2012년 선거는 대한민국 선거 역사에 남을만한 선거였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겨레

1. 진도 5.0의 ‘인구 지진’이었다

언론에서는 박근혜 후보에 표를 몰아준 50대가 이번 선거의 핵심으로 ‘50대의 반란‘ 이라며 분석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변했다. 미국은 더이상 백인만의 국가가 아니다”라며 기사가 쏟아졌었다.
올해 한미 대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인구 충격(Demographic Shock)’ 이 될 것이다. 이제는 인구충격이란 말을 넘어 인구 변화로 인한 사회변화의 지각변동인 ‘인구지진(Age-Quake)’란 말이 다시 화두로 등장할 법하다.
미국에서는 소수민족, 이민자의 표심이 박빙인 선거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고 한국에서는 고령화가 선거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4년전에는 ‘최초의 흑인대통령’이란 역사적 상징성이 모든 이슈 분석을 잠식했지만 올해는 오바마가 지난 4년간 해놓은 치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오바마 심판론’이 우세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세상이 달랐다. 미국의 인구변화는 예측된 것이지만 선거에서 ‘영향력’이 현실화 된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흑인 대통령에 이어 곧 히스패닉 대통령이 나오고 20~30년 사이에 백인이 전체 인구의 50%를 밑돌 것이란 예측이 있었지만 이는 어느정도 사실이긴 하지만 쉽사리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미국 대선에서는 오바마에 93%에 가까운 몰표를 준 흑인은 물론 70%를 넘었던 히스패닉과 아시아 등 소수 민족들이 오바마에 투표한 것이 당선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 정계와 언론에서는 특히 아시아인들이 오바마에 몰표를 준 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흑인과 히스패닉은 미국에서는 사실상 미국의 저가 노동력의 핵심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더라도 소수민족 중에는 그래도 잘사는 편에 속하는 아시안들이 히스패닉(71%)보다 더 많이 오바마를 지지(73%)했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다들 난감해하고 있다.
어쨌든 이민자 소수민족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서 공화당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당분간 집권이 힘들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공화당이 백인(59%가 롬니 지지) 남성(52%가 롬니 지지)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인식되는 한 한계를 넘어서기 힘들다는 것이다.
민주 공화당 전당대회 모습을 보면 양당의 차이를 크게 확인할 수 있다.
공화당은 전당대회를 채우는 사람들이 거의 백인인 반면 민주당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런 상황만으로도 앞으로 더 많아지는 이민자들을 과연 어떤 정당이 표로 흡수할 것인가는 쉽게 예측이 가능하다.
물론 선거란 것이 후보자와 공약, 대외 상황, 실언 등 변수가 많기 때문에 ‘꼭 그렇다’고 보긴 힘들지만 기본적 토대는 변했다는 것은 확실해보인다.
한국에서는 ‘인구 충격’이 고령화에서 왔다.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번 선거처럼 확실히 보여준 적은 없었다.
나는 이미 예측한 바 있고 최근 인구 구성 변화에 따른 표심 등에 대한 기사도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굳이 다시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고령화’가 이제 선거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에도 순차적으로 충격을 줄 것임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 위대한 선거였다고 생각한다.
이를 대비하는 것이 바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며 이는 5년, 10년후 선거에 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은 평균 연령(2011년 기준)이 39세로 아태국가에서는 일본(45.4세)에 이어 2위다. 호주는 37.9세, 미국은 37.1세, 중국은 35.9세, 싱가포르는 33.5세다. 우리가 대략 미국인 평균보다는 2살 많고 중국인 보다는 3살 정도 나이가 많은 상황이다.
숙련 노동자의 은퇴, 생산인력 고령화, 복지에 대한 사회적 부담 가중, 사회 역동성 상실, 보수화 등등 앞으로 답 안나오는 논쟁꺼리들이 수두룩하게 쏟아진다.
여기에 ‘저출산’ 충격이 곧 겹친다. 2020년부터는 한국의 인구가 순감으로 돌아서게 된다. 생산 가능인구도 줄고 순수 인구도 줄어든다.
이 같은 인구지진은 무엇을 말하는가? 당연히 경제 성장률은 낮아지고 복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수준은 높아진다. 지금까지 앞선 세대들은 걱정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예측 안해본 ‘걱정할만한 일’이 계속 나온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를 문재인 후보가 말했던 것처럼 ‘저출산 고령화 위원회’로 해결할 수 있을까? 박근혜 후보처럼 ‘노인복지 퍼주기’로 해결할 수 있을까? 앞으로 5년, 10년후 있을 선거때마다 ‘증세없는 복지 확대’와 같이 소리없는 아우성식의 모순 화법으로 대충 넘어갈 생각인가.
그로 인한 충격은? 사회 갈등은? 스트레스는? 양극화는? 그때마다 힐링한다며 이벤트 만들어서 적당히 넘길 셈인가.
이번 선거 결과는 진도 8.0~9.0 이상의 ‘인구 대지진’이 오기 전에 한반도에 닥친 진도 5.0 정도의 흔들리는 느낌을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강도의 인구 지진이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이번 투표 결과는 누구에게 표를 줄 것인가 하는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고령화가 생존의 문제로 다가오는 시기가 온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잡작스레 줄어드는 인구, 생산 인력 부족에 비해 늘어나는 노인층과 외국인, 북한과 통일되면 몰려올 북한 인구로 인한 또 다른 충격. 이런 문제들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스트레스 안받고 살아갈 자신 있는가?
우리가 지금 선거 결과 세대 갈등으로 속상해서 술마실때인가 싶다.


2. 유권자는 계급 투표를 하지 않는다.

한국 선거 결과를 두고 “왜 노동자, 농민, 약자들이 부자를 대변하는 새누리당을 지지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이는 보수 진영보다는 진보 진영의 숙제이기도 하다. 노동자 농민, 서민을 대변한 정책을 개발하고 내놓고 있는데 이 것이 실제 표로 연결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서민들이 부자인 롬니에게 표를 던지는가?”라고 이해할 수 없다는 민주당 골수 지지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계급’또는 ‘이성적 판단’의 관점으로 선거를 보면 답이 안나오는 경우가 많다. 다수 유권자는 계급 투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1)경험에 근거한 판단이 정보를 대체한다(Heuristics as Substitute for Information)

미국의 노동자, 서민층은 투표 수로 보면은 연봉 10만달러 이상에 비해 절대적인 수가 많다. 오바마는 의료개혁 법안인 ‘오바마 케어’를 1기의 중점과제로 공화당의 반대에도 밀어부쳐서 통과시켰다. 오바마 케어는 분명 서민들이 더 이득을 보는 정책이다. 워낙 복잡하지만 단순이 말하면 군수 산업과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쓰이는 지원하는 금액을 줄여서 서민들의 헬스케어에 쓰겠다는 공약이었다. 미국의 의료보험 체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불안해서 “병 걸리면 파산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오바마의 공약은 서민들을 위한 것이 많았다. 반면 롬니는 부자를 대변하는 정당에 속해 있고 스스로 베인앤컴퍼니의 CEO를 지낸 백만장자이며 아버지도 정치인이었던 ‘엄친아’ 였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오바마는 332석을 차지, 206석을 차지한 롬니를 압도적으로 이겼지만 득표수로는 50.1%대 48.4%로 2%가 안되는 차이로 간신히 이겼다.
‘계급’의 관점으로 봤을때 오바마가 선거인단 투표는 물론 득표수에서도 압도해야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유권자들은 자신의 ‘계급’과 선거때 나오는 정보에 의해 투표한다기 보다는 ‘경험적 지식’에 의해 투표하기 때문이다.
이를 휴리스틱스(Heuristics)라고 한다. 휴리스틱스는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에서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경험학, 어림법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한마디로 표현하면 ‘경험에 근거해 판단한 지식’을 말한다.
샨토 랜거 스탠포드 정치과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선거에서 점차 경험에 근거해서 판단한 지식이 ‘정보’를 대체하고 있다(Heuristics as Substitute for Information)”고 분석했다.
유권자들은 ‘장기적’ ‘단기적’ 경험을 통해 투표 여부를 결정하고 실제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장기적 경험은 오랫동안 형성된 정치적 아이덴티티(Party ID), 그동안 자신이 투표한 결과(Retrospective Voting), 후보자의 지원자 그룹, 후보자의 태도(진실한가, 경쟁력이 있는가, 나를 케어할 수 있는 후보인가), 세대의 경험(Generation model, 즉, 전쟁 산업화 등) 등을 꼽을 수 있다.
단기적 경험으로는 가족과 친구, 회사 동료 등이 미치는 영향과 미디어에서 나오는 정보 등이다.
유권자는 이 같이 장기적, 단기적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종합적 판단으로 투표를 하는 것이지 ‘자신의 계급’과 같은 이성에 의해서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샨토 랜거 교수는 “미국 대선은 펀더맨털 분석만 보면 롬니가 이길 확률은 47.5% 였다. 정치학 교수인 나도 친구들과 내기에서 롬니가 이긴다고 걸었다. 하지만 오바마는 예측을 넘어섰다. 실업률이 높으면 야당 후보가 이긴다는 등의 기존 분석이 작동하지 않았다. 역시 휴리스틱 보팅이 작동한 것으로 보여진다. 휴리스틱 보팅 중에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퍼스낼러티다. 롬니는 공감을 얻지 못했다. 그는 나를 케어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리더십이 강하고 경제를 잘 이끌어갈 것 같다는 이성적인 판단은 있지만 대중들의 공감을 얻는데는 실패했다. 선거에서 공감(Empathy)과 퍼스널 태도가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휴리스틱’ 분석으로 봤을때 한국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누가 더 ‘공감’을 얻도록 노력했는지, 누가 서민들을 잘 케어할 것 같은지, 후보자의 태도는 어땠는지, 세대 경험은 어땠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박근혜 당선인은 ‘공감’을 뛰어넘어 아예 ‘동정’의 단계까지 갔다고 보여진다. 유권자와 후보가 공감하는 것을 넘어 동정표를 얻어내는 수준에 까지 갔다는 것이다. 실제로 특정 세대과 계층에게는 공감(Empathy)보다 더 강력한 단어인 동정(Sympathy : 동정, 연민, 지지, 동의, 공감)’을 이끌어낼 충분한 계기들(TV토론 등)이 많았다.
특정 계층에게 그는 ‘독재자의 딸’로 이이보다는(그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 어버니가 모두 암살당한 불쌍한 여성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박 당선인을 보면 “어떻게…(박정희 전대통령 영결식때 시민들이 울며 탄성을 지른 말)”란 단어를 떠올리는 어른이 아직도 많다. 
그가 탄핵 사태 이후 TV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천막당사”와 신촌에서 칼로 긁힌 이후 “대전은요” 한마디로 판세를 뒤집은 신화를 만들며 ‘선거의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도 ‘동정’을 이끌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권자를 대하는 개인적 태도도 뒤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후보도 그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공감능력을 갖췄다. 하지만 박 당선인의 ‘Sympathy’는 사실 온갖 탄압과 고통을 딛고 일어난 김대중 대통령과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도 계속 지는 승부를 고집했던 노무현 대통령에 버금가는 확실한 무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앞으로 탄생할 어떤 여야 지도자도 박근혜 당선인 만큼의 폭발적 감정을 불러일으킬만한 후보를 찾기는 힘들 것이란 것도 사실일 것이다. 

@Shanto Iyengar 

(2)넘쳐나는 정보가 오히려 감성에 의존하게 한다

‘휴리스틱 투표’는 인터넷 선거, SNS 선거가 될수록 그 경향성이 짙어지고 있는데 이는 후보자의 ‘공감능력’ 뿐만 아니라 정보가 넘쳐나는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TV나 신문, 인터넷은 물론 SNS를 통해서도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넘쳐 흐르는 상황에서 유권자는 정부나 캠프, 언론으로부터 나오는 ‘정확한 데이터’ 보다는 오히려 ‘경험에 의한 정보’를 더 신뢰한다는 역설이다.
한국과 미국의 시차 때문에서 이번 대선 토론은 3차 TV토론만 봤는데 박근혜 당선인이나 문재인 후보가 서로 문서를 쳐다보면서 “우리 공약은요..” “공약집에 보면 나옵니다” 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약을 제대로 몰라서 TV토론 수행이 형편없었던 박근혜 당선인은 물론이거니와 문재인 후보도 공약을 숙지하고는 있었지만 캠프가 만들어준 ‘공약집’에 나온 내용을 말하는 수준에 그쳤다.
두 후보 모두 ‘정책선거’라는 대의를 위해 공약을 준비하고 실천하려는 모습을 기자회견을 하고 정책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캠페인 기간 내내 보여주려 애썼으나 실제 행동에서는 역설적으로 공약에 의존하지 않는 모습을 나타냈다.
유권자들이 과연 공약집에 나오는 정확한 데이터를 중요하게 생각할까? 표심에 큰 영향을 미칠까?
그렇지 않다. 유권자의 60%는 ‘오로지’ 혹은 ‘대체로’ 정당을 기준으로 후보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 다음 기준은 후보자들이 쟁점에서 보이는 ‘견해’다. 특정 사안에 대해 후보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여부였다.
특히 오직 ‘한가지 쟁점’이 중요하다(예를들어 독재자의 딸은 안된다는 견해나 참여정부가 무조건 싫다는 견해)고 생각하는 유권자는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후보자들에게는 결코 표를 주지 않는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3김시대 종식’ ‘수도 이전’ ‘한반도 대운하’와 같이 뜨거운 쟁점이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에 지지하던 정당과 선험적 판단을 기준으로 후보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예전에 비해 커졌다고 보여진다.
유권자들은 수많은 신문과 방송이 정책선거를 하자며 정책을 비교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도 실제로는 각 후보자의 공약을 잘 알지 못할뿐만 아니라 심지어 꼼꼼히 따져보고 싶지도 않아한다.
캘리포니아대 샌디에고(UCSD) 정치과학과 사무엘 팝킨 교수는 ‘미국 유권자(The American Voter)’라는 책에서 미국인들이 미국의 정치적 인물과 사건에 대해 지식이 부족하다고 실제 경험을 통해 알려한다고 분석했다. 예를들어 미국인들은 정부와 의회의 각종 에너지 계획안의 세부 사항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주유소의 기름값을 통해 에너지 정책에 대해 일반적 상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공약도 세세하게 알려하지 않는다. 후보자들이 어떻게 말하는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판단한다는 것이다.
팝킨 교수는 이를 ‘감성적 합리성(Gut Rationality)’라고 분석했다.
유권자들은 아이폰이나 갤럭시폰이 아니다. 그 모든 이슈를 다 저장하고 기억하고 공유하지 못한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나오는 많은 이슈 중에 자신이 이해할만한 것만 스스로의 판단 기준에 따라, 그것이 매우 비합리적이라고 하더라도 판단하고 결정한다. 정확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미국 대선에서는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2년 조지 부시와 빌 클린턴의 TV토론 도중에 조지 부시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계속 쳐다봤다. 이 장면에서 유권자들의 ‘감성적 합리성(Gut Rationality)’이 받은 메시지는 “부시는 토론에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을 이해하려들지 않는다. 건방지다. 나는 그를 신뢰할 수가 없다”로 이어졌다.
클린턴은 이와는 반대로 같은 토론장에서 관중석의 한 여성이 질문을 하자 그 여성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성실히 대답했고 그 여성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클린턴이 무엇을 얘기했는지 기억속에 없다. 다만 클린턴의 성실한 태도와 여성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만 기억에 남아 투표장에 갔다. 작은 동작이 수십만명의 마음을 바꿔놓은 것이다.
올해 미 대통령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바마가 재선이 안됐다면 결정적 장면은 아마 1차 TV토론이었다는 것에 이론이 없을 것이다.
1차 토론에서 오바마와 롬니는 ‘말솜씨’와 ‘이슈 장악 능력’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내용에서는 오바마가 이기지 않았나 봤다. 하지만 미국 유권자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냉정하지만 오바마에 비해 토론능력에서는 떨어진다고 봤던 롬니가 차분히 “내가 대통령이 되면 첫날 이렇게 할 것이다” “대통령. 나는 저렇게 하겠소”하면서 오바마를 몰아세운 반면 오바마는 자꾸 대본을 보고 땅을 쳐다보면서 자신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TV토론은 오바마는 2기를 이끌 자신이 없어 보인다는 이미지를 각인시켰고 롬니는 준비된 후보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이날 TV토론 이후 지지율이 역전이 되는 현상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유권자들이 ‘감성적 합리성’에는 오바마가 두번째 정부를 이끌 자신감이 없는 것으로 비춰졌던 것이지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정책’ 이나 ‘내용’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표심이 머리와 가슴, 이성과 감성 중 무엇에 따라 움직이느냐는 논쟁은 끝났다.
정보 과잉 시대 ,탈산업화 시대의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유권자들이 무엇을(What) 생각하느냐, 유권자에게 어떤 정보를 주느냐보다 그들이 어떻게(How) 느끼느냐, 왜 그렇게 느끼느냐(Why)다.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후보를 공격함으로써 유권자들에게 ‘무엇을’ ‘어떤 정보’를 주느냐의 이슈 몰이에서는 성공했겠지만 유권자들이 어떻게 느끼고, 왜 그렇게 느끼느냐에 대해서는 완전히 실패했다. 결과는 50대의 등돌림과 60대의 몰표로 이어졌다.
정보가 많아질 수록 유권자들이 이성적으로 투표할 것 같지만 사실은 감성(적 합리성)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What)’이 ‘얼마나 많은(How many)’ 것이 중요한 시대는 이미 지났다. 대중들은 인터넷 검색으로, 스마트폰 앱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경험으로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이제는 어떻게(How)와 왜(Why)의 시대다. 커넥티드 시대, 대중은 터치하면 알아서 움직인다. 

Wrap up

2012년 11월과 12월 각각 선거를 마친 미국과 한국. 모두 대선에서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진보와 보수 각각 절반씩 갈라졌다. 특히 인구 구성 변화가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당락을 결정한 것은 ‘공감(Empathy)’이었다. 유권자들은 경험에 의해 판단된 지식(휴리스틱)을 언론 등을 통해 얻은 정보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과 다르게 한국은 선거 이후 진통을 겪고 있다. 이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각 세대별로 다른 경험의 충돌(The Collision of experience)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 더. “한국은 왜 계급 투표가 안되나요?”란 질문에 최장집 교수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최 교수님은 지난 10월 내가 객원연구원으로 있는 스탠포드 아태연구소에서 발표를 하셨는데 그는 “정치적인 정당 제도 조직이 안돼 있는 것이 결과다. 사회 갈등들이 대표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당 구조의 악화가 계급 투표를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대선 경쟁의 틀이 이런 공간을 놓고 하면 괜찮은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만약 사회의 결집, 이슈가 결집되는 역할을 정당이 한다면 계급의 요구를 수용하고 이것이 투표로 이어질 수 있다” 고 말했다.
버젓이 여당이 존재했는데 대통령이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여당이 스스로 기존 정당을 깨고 새 정당을 만들고(새누리당) 야당도 단일화 결과에 따라 후보를 못낼 위기를 맞고(민주당).. 한국의 정당정치는 여전히 불안하고 실험 중이다.
최 교수님이 평소에 하시던 말씀대로 꼭 ‘양당정치’일 필요는 없다. 양당제는 오히려 미국의 특이한 제도다. 노동당, 보수당 양당제가 나름 확고한 영국에서도 3당(자유민주당)이 그럭저럭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으며 지난번 선거에는 보수당과 연정, 정권교체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이번 선거전에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제는 다양화하는 미국을 담아낼 그릇이 못된다. 제 3의 정당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은 양당제이건 다당제이건 ‘정당제’ 자체가 여전히 불안하다. 정부도 정당에 의해 지지되는 것이 아닌 ‘캠프’에 의해 좌우됐다. 이는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공통적인 과오이기도 하다.이 같은 정당정치의 불안은 유권자들이 자신의 이익에 기반한 투표가 아닌 경험에 의한 투표를 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 최장집 교수님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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